참호의 용사

1화 · 마감 — 그는 싸울 몸을 가졌지만, 자기 주먹이 사람을 죽일 뻔한 걸 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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마감까지 네 시간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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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훈

포탄 터지는 소리는... 이렇게 그리면 되나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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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거 아니면, 나는 할 수 있는 게 알바밖에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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쿠으으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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쾅!!!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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진흙 냄새가 났다. 그림에는 냄새가 없는데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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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훈

이거... 내가 그린 거잖아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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병사

엎드려—!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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타타타타타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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퍼억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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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이걸 백 번도 넘게 그렸다. 한 번도 무섭지 않았다. 종이였으니까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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병사

너! 덩치! 뭐 하는 거야, 싸워!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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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훈

못 해... 나는... 사람을 죽이지 못해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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중학교 때 나는 작고 말랐다. 그림 하나만 잘 그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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중3 졸업하던 날, 복싱을 시작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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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2가 되자 183에 100킬로. 학교에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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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진

야, 뭘 봐 씨—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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퍼억!!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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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진

미, 미친놈이야! 튀어!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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왕따 학생

가... 감사합니다. 정말로..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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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애의 얼굴에, 중학교 때 내가 겹쳐 보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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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때 알았다. 이 주먹은... 누군가를 지킬 수도 있구나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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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뒤로는, 누가 맞고 있으면 내가 나섰다. 학교에서 나는 영웅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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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3이 되자 글러브를 걸어두고, 태블릿을 들었다. 미대에 갈 거니까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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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런데 학원은... 석고상만 그렸다. 죽을 만큼 지루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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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고3 가을. 그놈들이 또 다른 애를 몰아붙이고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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퍽!!!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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쿵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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놈은 움직이지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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응급실. 나는 가해자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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놈은 2주 동안 깨어나지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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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진 어머니

우리 애가... 우리 애가 죽으면 너도 죽어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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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적처럼, 놈은 깨어났다.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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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람 얼굴을 친 그 한 방에, 내 주먹뼈도 부러졌다. 학원도, 미대도 거기서 끝났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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학교에선 영웅이었는데, 밖에선 아무도 나를 모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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졸업하고, 운동을 끊었다. 나는 먹보였다. 120킬로가 됐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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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날 이후로, 나는 사람이 무서워졌다. 내가 다가가면 누군가 죽을 것 같아서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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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훈

미안해. 미안해..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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쐐애액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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천막 안은 비명으로 가득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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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훈

집에... 가고 싶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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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우우웅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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콰아아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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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나

성공했습니다! 용사님이... 강림하셨습니다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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귀족

저... 저게 용사라고? 돼지 아닌가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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레온

……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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용사여. 그대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 불려왔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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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림자 없는 왕. 얼굴이 없는 자. 놈의 목을 가져오라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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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훈

저... 저는 그냥 만화가인데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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천 년에 한 명 나온다는 혼합속성.
스무 살 웹툰 작가 한지훈. 고3 때 일진을 말리다 한 방을 날렸고, 그놈은 2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. 그 한 방에 자기 주먹뼈도 부러져 미대를 포기했고, 졸업 후 120kg 폐인이 됐다. 마감 중 자기가 그리던 1차대전 참호로 떨어진 그는, 거기서도 총검을 쥐지 못한 채 기어서 도망친다 — 자기 주먹이 사람을 죽일 뻔했다는 걸 아니까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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